견고한 것을 애매모호하게,

명료한 것을 풍요롭게

신지이

아트스페이스 풀 큐레이터

엄지은은 분명하면서도 꽤나 아리송한 사람이다. POOLAP 프로그램의 인터뷰, 세미나 그리고 소소한 대화를 지켜보며 느낀 바로는 그렇다. 작가는 작가노트를 통해 싫은 것, 이해할 수 없는 것, 불편한 것, 그래서 호기심을 끄는 것들을 분명하게 열거하며 작품의 설명을 대신했다. 한편으로 그러한 명료한 성정과는 다르게 포트폴리오는 연대순이 아닌 비선형적으로 구성하여 소개했는데, 그것이 효과적이었냐는 차치하고, 복잡한 작품의 배열이 마치 당위 내지는 구체성을 거부하는 사람으로 보였다. 마땅히 그렇게 해오던, 관습에 기대지 않는 그런. 작가는 시선에 걸리는 것들을 명료하게 나열하고 다시 모호하게 흐트러트리는 사람이다. 앞으로 전개할 작품이 딱 작가의 모습과도 같아 시작에 적어둔다.

형(形)을 어지럽히는 건축

'마구리'는 길쭉한 형태의 토막이나 벽돌 등의 끝 면을 말한다. '마구리쌓기'는 이 마구리면이 바깥으로 오게 하여 쌓아 올리는 건축의 한 기법으로, 적은 벽돌의 개수로 최대치의 벽 두께를 낸다는 점에서 매우 효율적이다. 엄지은의 2015년 작 <마구리쌓기: 사랑을 나눕시다>의 무대가 되는 휘경4철도건널목은 높은 유지비용과 저소득층의 생계 사이의 갈등을 유지비용 반반 부담이라는 언뜻 효율적인 해결책으로 봉합한 곳이다. 작품의 구조는 이 같은 효율 충돌의 장소성에 '나눔'이라는 키워드를 끌어들인다. 아파트와 연립주택이 번갈아 등장하고, 주거비용은 삼등분이 되어 화면을 덮으며, 게임 중인 두 남성의 대화는 축구 경기 장면으로 빠르게 전환되는 등 작가는 등장하는 지표들을 둘 혹은 셋으로 집요하게 나누어 제시한다. 장소가 갈등의 해결책으로 제안한 '나눔'을 수단으로 하여, 마구리쌓기로 벽을 올리듯, 장소를 다시 분리-분할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나눔과 효율은 경제 상황을 은유할 때 같은 목적을 갖기 힘들다. 효율은 상대적이고, 나눔은 절대적이기 때문이다. 그것을 등가로 놓고 이야기를 전개하는 엄지은은 말과 장소에 입혀진 상징과 의미들을 교란시킨다. 물리적인 나눔을, '주다'라는 보조용언을 품고 있는 '나누다(나누어주다)'의 쓰임과 섞는 것에도 그렇다.

     <믿음으로 승리하는 삶>(2015)은 진용, 새, 소녀라는 세 개의 이야기가 장소를 넘나들며 전개되다 공통의 풍경 아래로 합쳐지는 모자이크식 구성의 영상작품이다. 세 개의 이야기지만 두드러지는 주체는 경쟁 사회에서 탈주한 청년 진용과 갱년기를 맞은 중년 여성(소녀)다. 당면 과제를 해결하는 것이 승리라면 진용의 방식은 가족의 기대를 저버리는 것이었다. 중년 여성은 미디어가 전파하는 갱년기 치료법을 찾아 제 3의 공간(그것은 종교일 수도, 타지일 수도 있다)을 누빈다. 두 개의 승리하는 삶에서 믿음의 역할은 어떠한가. 작가는 "한 개인이 '믿고 있는 것'에 대하여, 우리가 '믿고 있는 풍경'들에 대하여, 그리고 '무엇이 개인을 그렇게 믿게 만들었을까"라 묻는다. 누군가에게 족쇄이기도, 속없는 이야기이기도 한 것들에 대한 흔들기, 교란이 또 한번 이루어졌다.

     영상과 사운드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자. <믿음으로 승리하는 삶>은 파운드 푸티지(Found footage)같이 촬영과 편집 사이에 틈이 드러나는, 목적을 가능하기 어려운 장면들의 연속으로 전개된다. 어떤 쇼트(Shot)에는 의도적으로 피사체를 구부린 것들도 발견되는데, 이들이 공간을 피상적으로 인식하게 만든다. 대중교통의 안내음과 같이 안전을 염려하거나, 뉴스 한 꼭지를 통해 나오는 온정을 구하는 메시지들은 통상 여성의 목소리로 구현되곤 한다. <마구리쌓기:사랑을 나눕시다>는 이 같은 여성의 목소리로 시작하여, 트로트, 발라드와 같은 통속적인 대중음악이 영상 전반에 지속적으로 깔린다. 난삽하게까지 느껴지는 장면의 전환, 그래픽과 촬영 영상의 콜라주 등 이질적인 것들의 결합을 역시나 낮은 질의 사운드로 접붙이고 있는 것이다. 피상적이고 통속적인 것, 그것은 장소와 이야기가 갖고 있는 첨예한 갈등의 무게감을 덜어내면서 결과적으로, 통속이라 붙여진 것들에 대한 세간의 평가처럼 이 영상들 또한, 저급하고 빈약함을 추구하는 걸로 보인다.

     엄지은은 건축에 관심이 많다고 한다. 마구리에 관심을 갖게 된 것도 벽돌을 쌓는 것이 영상의 클립들을 겹쳐 올리며 화면을 구축해내는 작가의 작업 방법과 유사하게 느껴졌다는 것이다. 그러나 작가가 건축해낸 것은 의미를 교란시키고, 굳건한 것들을 흔들면서 최선을 다해 물성을 버리려는 것으로 보인다. 그의 호기심은 그러니까 결과물로의 건축이 아닌, 벽돌이라는 이미지를 쌓아올리며 의미의 구조를 전환하거나 또는 숨기는 은유이자 태도로의 건축인 것이다.

현재에 겹쳐지는 과거를 이해하기 위해

위에서 언급한 작가의 저급하고 빈약한 이미지의 추구는 <샷다와 셔터>(2016)에서 더 극적으로 나타난다. 재개발로 사람들이 빠져버린 을씨년스러운 동네의 골목을 걷고 집안을 살피며 핸드폰 카메라로 채집한 풍경들을 그래픽 영상과 섞는다. 그리고 오브제나 텍스트들을 2차원 이미지처럼 떼내어 화면을 생경하게도 구성한다. 작가는 특히나 태백살(太白殺), 계축일(癸丑日), 부적,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 등 전근대의 흔적들로 여겨지나 동시에 현재에도 유효하게 작동하는 것들에 주목한다. 그러니까 오랜 시간 집이, 공동체가 만들어지면서 세워진 갖가지 기술적 계획들 속에서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길흉화복(吉凶禍福)을 향한 욕망 내지는 두려움의 오랜 기록들이 현재에 재개발이라는 미래를 위하여 가차 없이 버려진 것들을 포착하고, 영상을 통해 재차 납작하게 재현하고 있는 것이다. 작가는 "사건의 구체적인 디테일이 사라지고 추상화되는 지점"에 주목했다고 한다. 여기서 추상화되는 지점이란 구성원들이 빠져나간 빈집으로부터 "삶의 구체성이 일시에 사라지고, 풍경 전체가 급속히 자본과 개발과 같은 추상적 개념으로 변한"것이다. 이는 사실 작가가 이전까지 쌓아올린 사유의 방식과 대척점에 놓여있다고 볼 수 있다. 추상화된 폐허의 공간을 기록하는 것과 전작들처럼 견고한 어떤 지점들에 흠집을 내고 허물려는 시도 사이에는 상이한 시점이 존재하는 것이다. 옮겨진 그 시점만큼의 폭을, 조금 섣부르지만, 작가에게 스며든 이해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한 연민 내지는 이해의 과정으로 부르고자 한다. 

     엄지은은 동명의 작품을 여럿 제작했다. <마구리쌓기:사랑을 나눕시다> 영상작업 이전에 <사랑을 나눕시다>(2014)와 <마구리>(2015)라는 드로잉 작품이 있으며, 이후 2016년에 <안도의 마구리:벽>(2016), <마구리쌓기:building Fortune> 퍼포먼스 영상작이 있다. 제목들은 유사, 반복된다고 해서 비단 내용이 연결되진 않는다. 이러한 언어의 반복적 사용은 언어에 고착되어 있는 의미들, 더 나아가 그것의 작가적 해석을 재고하는 과정으로 읽힌다. 채집된 장면을 마주한 작가의 시점 변화, 하나의 단어를 놓고 갈라지는 해석의 전환이 담지하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작가는 2014년 진행한 개인 프로젝트의 제목인 "LIFE VEST UNDER YOUR SEAT"를 올해 상업화랑에서 열린 그의 첫 개인전에 다시 사용한다. 비행기에 오르면 발견할 수 있는 "구명조끼가 당신의 좌석 아래에 있다"라는 안내문을 발견했을 때 안도보다는 불시에 닥칠지 모르는 재난을 먼저 떠올리게 된다. 동명의 프로젝트를 처음 올렸던 그때에서 삼 년이 흐른 뒤 영상 속 작가는 촛불집회가 한창인 광화문을 통과한다(<파트 타임 로드(part-time-road)(2017)). 거리의 소음을 그대로 전하는 영상은 밤거리의 시커먼 어둠과 대비되는 진동하는 흰 불빛으로 인해 현기증 나는 잔상을 남긴다. 거기에 가벽을 다듬고 있는 또 다른 시공간이 겹쳐지면서 울렁증은 배가 된다. 구명조끼를 입으면, 시키는 대로 움직이면 살 수 있느냐고 묻는다면 그렇지 않다고 적어도 2014년의 시간을 통과한 우리는 대답할 수밖에 없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다시 광화문에 모였고, 그곳을 지나 아르바이트를 하러 가는 여정에는 단지 20여분의 시간이 아니라 지난 삼 년간의 고민이 담겨있어 보인다. 같은 문장 아래 놓인 이해할 수 없는 의미들을 뒤섞고 흔들다 툭 떨어져 나온 것들을 다시 살피면서 말이다.

     재개발, 지역민과 시설공단과의 갈등, 신앙 등 작가는 가볍지만은 않은 주제들을 선택해 왔다. 2017년 오뉴월 이주헌의 <이월토크>전에서는 이전과는 달리 부담을 조금 덜어내고 작가가 갖고 있는 은유를 다루는 감각을 일종의 놀이처럼 펼쳐놓았다. 무균 모래가 나무 구조물 위로 쏟아져 작은 산을 이룬 설치작 <방지턱>(2017)은 뽀얗고 부드러고 유약해 보이지만 높은 곳을 지향한다는 점에서 매우 상서롭게 느껴진다. 작가가 주제로 삼았다는 풍수 인테리어와 방지턱의 관계를 찾기 위해 인터넷을 뒤지다가 아주 흥미로운 해석을 발견했다. 산도 없고 물도 없는 도시에서는 40층 이상의 고층 빌딩을 등지고, 도로를 둥글게 낀 지세가 명당인데, 물의 흐름도 너무 빠르면 그것에 복이 빠져나간다 여기는 것처럼 교통흐름이 빠르면 돈이 빠져나가니 집 앞에 방지턱이 있으면 좋다는 것이다(왜 아니겠는가). 작가는 그러한 방지턱에 오행을 대입하고 상극의 기운을 막는 구조까지 입혀서는 경사진 도로가 아닌 고즈넉한 한옥집 마당에 놓았다. 물리적 기능으로 완결성을 갖고 있는 방지턱의 구조를 도상적 기호로만 읽는 풍수 해석을 가져다가 다시 물성으로 지어내면서 애초의 기능을 모두 제거해버린 것이다. 여러 번의 형이하학과 형이상학적 전복을 거친 이 구조물은 은유를 다루는 작가의 날카로운 감각이 매력적으로 조형되어 있다.

     아트 스페이스 풀에서 선보인 신작 <잠수병>(2017)은 전작들에서 보여지는 작가 특유의 은유를 다루는 감각들을 더욱 모호하게 드러낸다. 해녀의 직업병이라 흔히 해녀병으로도 불리는 잠수병은 깊은 바닷속 높은 수압에 눌려있던 신체가 너무 빠르게 수면 위로 올라왔을 때 채 몸속의 질소 기체를 뱉지 못해 겪는 통증을 말한다. 그러니까 안과 밖, 두 세계의 압력차로 인해 겪게 되는 격렬한 신체의 반응인 것이다. 영상 작품 <잠수병>은 밸브를 여닫는 기계의 평면도로 보이는 드로잉 작품 <배선도>(2017)와 한 짝을 이룬다. 영상에는 땅으로부터 구부러져 나왔고, 참지 못해 터져버렸고, 그것으로 반응하는 것들이 담겨있다. 그리고 시작과 끝에는 종교가 자리한다. <배선도>를 살펴보자. 이는 실제 기능하는 기계는 아니다. 작가의 말에 따르면, 밸브 개폐 조정 장치의 필수적인 부분만 차용한 설비가 고객의 환경과 만나는 전기배선도라고 한다. 여닫음을 관장하는 기계, 그리고 그것에 나있는 다른 소통의 가능성. 서로 수직으로 밀며 막혀있는 힘, 그러다 터져버려 세상에 쏟아져 나온 것들. 엄지은이 언어를, 풍경을, 대상을 은유하여 굳건한 것을 흔들어 교란을 시도해 왔고, 때때로 그것에 연민을 느낀다는 것을 떠올리며 새로 펼쳐진 이야기를 따라갈 것을 권유해본다. "애매모호성은 하나의 풍요로움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보르헤스(Jorge Luis Borges) 소설 속 등장하는 말이다. 너무나 추상적이고 애매모호하게 펼쳐지는, 닫히고 또 열려버린 풍경의 연속에서 풍요로움을 향해 열린 저마다의 문을 찾을 수 있기를 바란다.

© Jieun Uhm  2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