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석 밑 구명조끼 - LIFE VEST UNDER YOUR SEAT 1

 

나가람

갤러리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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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상황에서 흔히 마주하는 문구이다.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정체이자 아주 느린 이동의 순간에 이 문구를 마주하면 비상상황 발생 가능성을 미연에 따져보고, 이 이동 자체의 위험성을 다시금 확인하고, 동시에 탈출이 성공할 확률의 미약함을 인지하며 약간의 감정적 피로감을 느낀다. 지난 동시대 역사 속 많은 사건들이 우리에게 가르쳐준 것은, 탈출이란 언제나 가능한 것이 아니라는 불신감이었다. 이런 패배감 앞에서 불안함을 느끼는 것은 허황된 일이 아니다. 앉아있는 좌석과, 그 좌석 밑의 구명조끼 사이로, 상념이 올라온다. 탈출과 목적지에의 도달 사이에서 정서적 탈진감을 느끼며 그에 익숙해질 때까지, 우리는 길 위에서 견디는 방법을 체득해야 한다. 이 체득에는 약간의 자기 위안과, 자포자기의 심정이 수반된다.

우리가 구명조끼를 사용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 실제로 사건이 일어나느냐, 일어나지 않느냐와는 관계가 없다. 부유하는 상태로서의 자아는 유영하며, 대처할 수도 없는(아직 일어나지 않았기에), 미연에 벗어날 수도 없는(이동 중이기에) 상태로 유예 당한다. 결국, 구명조끼란 어느 경우던간에 실제의 유용함을 잃고 머릿속에 울리는 사이렌처럼 이미지와 잔상으로 남는다.

엄지은은 시간 축을 중심으로, 유영하는 자아의 시선을 재손질한다. being 의 상태로서의 ‘나’와, ‘사건들’과, ‘물체’들 사이에서 고심한다. 이 과정에서 번복될 수 없는 엄격한 시간축이 아닌 공간의 축이 생겨나면서 작업은 새로운 국면을 맞는다. 현실에서 진행되는 수평적인 시간이 아닌, 수직적인 시간을 바탕으로 새롭게 인지되는 공간의 축이 있다. 이 축 위에서는 사건들이 반복되거나 어그러진다. 엄지은은 작가노트에서 “내 앞에서 돌부리가 튀어나와 있다는 걸 알면서도 일부러 걸려 넘어지는 것을 지향한다”라고 적었다. 이는 ‘돌부리’로 대체되는 과거의 사건들과, ‘넘어지고-있음’으로 표현되는 축의 변화와, 그에 따른 결과에 대해 인지하고 있음을 시사하는 표현일까.

전시장에는 3개의 영상작품이 있다. 이 중 하나는 3채널 영상이다. 그에 조응하는 비치물이 있고, 그 외에 도시의 색을 닮은 사진 하나, 만들어진 조형물 둘, 그리고 조형물 중 하나에 맞춘 사운드가 있다. 전시는 짧은 기간 휘발되듯 존재했다가 사라졌다. 전시장을 찾은 사람들은 공간과 조응하며 작동하는 여러 계단을 통해 몸을 위로, 다시 아래로 움직여가며 각 작품에 대한 조각을 그러모은다. 이 글은 이 기간과 공간에 대한 감회이자 기록이다.

걷기

<망원경>

옥상에 놓인 이 물체는 경북 영천 천문대에서 발견한 망원경을 재구성한 것이다. 방수포 아래 잠들어있는 망원경은 제 역할을 상실한 여타 모든 도상들을 쓸쓸하게 대변한다. ‘때(시간)’이 맞지 않아 사용이 중단된 망원경은, 방수포를 덧입고 그것이 투명망토인양 ‘보이기’를 멈춘다. 망원경은 천문학적 지식에 대한 열망을 대변한다. 그런데 엄지은이 주목하는 것은 망원경으로 '읽어낼 수 있는 것들'이 아니라, '망원경으로 읽어내고자 하는 욕망'이다. 방수포를 ‘덧입은’ 상태의 망원경은 알고자하는 열망을 ‘제지’하고 있는 중간자적 형태라고 할 수 있다. 망원경은 과녁을 향해 날아가는 화살의 순간과 같이, 과녁보다는 화살의 주변에 딸려가는 우리의 욕망을 가리킨다. 그런데 우리가 화살의 순간에 집중하더라도, 여전히 우리는 오독의 가능성을 갖고 있고, 순간에 대한 모든 것을 밝혀낸다 할지라도 그것이 우리에게 안심과 완결된 정보를 주는 것은 아니다. 경험은 정보나 정리가 되기 전의 ‘전달체’로 완결되어서는 안 된다. 시간의 경과나 강제성과 무관하게 잔존하는 것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 순간에 우리가 멈춰 발견해야 하는 것들이 사실이 아니라면, 무엇일까.

<파트 타임 로드 Part-Time-Road>, single channel HD video, 17’, 2017>

다큐멘터리의 일종처럼 보이기도 하는 이 영상은, 전시장 가벽을 치는 아르바이트의 수행 과정과 전시 마지막 날 전시장을 찾아가는 여정의 기록이다. 전시장의 가장 깊숙한 곳에서 가장 오랫동안 재생되는 이 영상 전반에는 운동감이 가득하다. 엄지은은 목에 카메라를 걸고 움직이면서 보행자의 시각에서 본 거리와 시간을 기록했다. 그리고 이를 통해 모종의 리듬감과 반복적 운동감을 잡아낸다. 영상 작품의 일반적인 매력 중 하나는 실시간(real time)2이라는 점이다. 이런 영상은 연출되거나 편집된 상황이 아니라 실제로 일어난 일들에 대한 기록성을 바탕으로 한다. 리얼타임 영상은 한 개인이 경험한 시간에 대한 증언으로서 작동한다. 관람자의 편의 또는 공감을 위해 보편화되고 가다듬어진 상황이 아닌, 실제로 ‘존재-했었음’ 그 자체를 증명한다.

앞서 영상은 시간을 기록한 것이라고 서술했다. 그런데 시간을 기록하기 위해서는 위해서는 운동감이 필요하다. x 시간만큼 걸었음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x 시간만큼 움직이는 다리의 운동감이 필요한 것이다. 이러한 면에서 이 작업의 전반부에 등장하는 운동감은 묘하게도 성실한 다큐멘터리 장치의 일종으로 변모한다. 영상에는 거리의 발에서 택시의 좌석으로 옮겨가면서 변화되는 리듬감도 들어있다. 여러 변주에도 불구하고, 영상은 강박적인 전진을 계속한다. 이는 아마 그 기저에 제한과 압박에 대한 의식이 있기 때문은 아닐까. 강박적인 움직임의 너머에는 제한과 압박이 있고, 그것이 우회와 순회로 연결된다. 목적지와 그곳에서 수행해야 할 목적은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하지만 매번 부딪히고, 길을 틀어나가는 과정에서 ‘아직-도달하지-못한-자’ 가 느껴야 하는 중간지대의 감각은 선명하다.

영상작업이 여타 시각예술과 형식적으로 다른 점은 ‘시간에 기반한(time-based)’ 예술이라는 점이다. 비디오아트는 시간에 대한 조작, 변화를 내포하며 동시에 시간의 진행에 따라 전개된다. 들뢰즈에 따르면 고전 영화 이후 모든 영화(이 글에서는 영상을 포괄한다)는 ‘운동감을 가진 이미지’를 재생산하는 것으로, 여기에서 운동감(걷기, 타기, 운전하기)은 이미지 내에 내포된 시간의 흐름에 따라 인지된다. 의도적이고 세심한 편집 덕분에 <파트타임로드>에는 운동감이 존재하지만, 시간의 흐름은 모호하다.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시간의 흐름을 의식하게 하면서도 의도적으로 시간의 흐름을 지연시키는 것이다. 이는 동시대 비디오아트에서 흔히 발견되는 ‘수직적 시간’의 일종이다. 고전 영화에서 사용되는 수평적인 전개를 탈피함으로써 보는 이로 하여금 시간 개념에 대한 혼란을 불러일으키고, 나아가 의도적인 정체를 만들어냄으로써 관람자로 하여금 특정한 순간에 집중하게끔 유도한다. 이에 따라 우리는 학습한 지각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관람하고 있는 순간을 인지하게 된다. 영상 속의 시간 축을 따라가려는 노력은 좌절되며, ‘인지하고 있는 나’만을 남겨둠으로써 공간성에 대해 집중하게 한다. ‘시간’이 기준이 아닌 세계를 볼 수 있게 하는 것이다.

한 편, 영상 속 길 위의 풍경 위로 오버랩되는 장면들은 무언가를 보수하려는 몸짓으로 가득하다. “틈이 없어 보이도록 무언갈 더 채워 넣고, 갈아내고, 덮는 과정”3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애초에 그 ‘틈’이란 보수 가능한 것인가? 라는 물음이 솟는다. 한 번 생겨난 것은 (엄지은이 전시 전반에 걸쳐 ‘시간의 축’을 의식하는 것처럼) 생겨나기 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 동시에 보수는 보수일뿐, 복구나 완전한 회귀로의 약속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수를 위한 노력은 계속된다. 틈 위로 덮여지는 풍경들 사이로 처음에 존재했을 무언가의 흔적이비친다. 동시에 풍경들은 아른거리며 떠나지않는다. 한번 있었던 것이 없는 것이 될 수는 없다. 이는 시간이 우리에게 약속(강제)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건의 불이행, 순차적이지 않은 상황 진행, 연속이 아닌 반복과 오류는 계속된다. 시간의 불가해함에 맞서는 듯한 몸짓이 이어진다.

영상은 전반적으로 흑백처리되었고, 노출 밸런스를 달리하여 어떤 장면은 마치 깊은 바닷속을 유영하는 듯 한 뉘앙스를 주기도 한다. 가로등말고는 아무 것도 알아볼 수 없는 상황도 있고, 구체적인 글을 읽을 수 있는 상황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풍경들 사이에서 어떤 의도를 읽는 것은 불필요하며, 다만 개인의 경험을 수집하고 비틀고 덧칠하는 과정을 통해 만들어진 기묘한 풍경들만이 남게 된다. 엄지은은 영화의 서사구조나 그를 만드는 기법에 대해서 분명히 의식하고 있으며, 우리의 오래된 눈이 영화적 기법에 유혹되지 않도록 영상을 세심히 조립한다. 분위기, 풍경, 색감, 지표, 소리를 읽으려는 노력은 무용해지며, 동시에 의견과 관념을 읽으려던 눈은 부끄러워진다. 이 영상은 두가지 길을 놓고, 선택을 강요하거나 어느 한쪽의 의견을 대변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엄지은은 ‘일시적으로 거리에 존재했었음’을 증명하면서 동시에 시간과의 약속에 의문을 던진다.

<난시, 조각 1-11>

3 채널로 제시된 <난시>는, 뻥튀기를 닮은 모양새의 시멘트 조각을 만드는 과정을 기록한 것이다. 조각은 16 개가 만들어졌고, 각 조각의 제작과정은 각각 기록되었으며, 일정한 규칙을 두고 각 스크린에서 ‘시작- 끝’의 과정을 반복한다. 언뜻 보기에 하나의 조각을 만드는 과정이 계속해서 반복되는 듯이 보이기도 하는데, 이는 우리가 이미지를 직접 보는 대신, 이미지를 ‘시청’하기 때문이다. 실제로는 모든 영상은 각기 다른 조각을 만들어내는 각기 다른, 유일한 과정이다. 그러나 현장에서 반복되는 제작의 과정을 볼 때, 이미지에 대한 ‘습득-이해-boredom’의 과정이 일어난다. 이는 영상을 ‘시청’할 때 일어나는 현상이다. 영상을 한 번 보고, 영상 속 시간의 흐름을 이해하면 우리는 ‘안다’고 생각하고, 즉시 지루함을 느낀다. 이는 미래를 예언하는 행위와 같다. 앞선 <파트타임로드>를 통해 우리는 엄지은의 영상 속 시간이 수평적이지 않음을 알았다. 우리는 엄지은의 영상 속 시간의 흐름을 예측할 수 없다(각 과정과 그 기록이 고유할지라도, 하나의 영상 속에서 순서대로 엮여있는지는 확인할 수 없다). 영상에서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단순한 제작의 반복일 뿐이다.

그런데 보는 이로 하여금 지루함을 느끼게 하고, 미래를 예상하게끔 만드는 것은 과정의 단순함 그 자체가 아니라, 각 과정에서 수반되는 무심한 노동력의 소비일지도 모른다. 붓는 행위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능률적이지 않고, 효율적이지도 않다. 건조한 손은 무용한 노력을 반복하는 듯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상은 과정의 결과물을 찾아 확인하고 유용함을 찾아보려는 욕구를 발동시킨다. 각 시도에 대한 실물을 확인하고 싶은 욕망은, 전시장 한 켠에 비치된 뻥튀기 사진들로 충족되어야 한다. 과정과 결과물 사이의 격차가 갈증과 함께 기시감을 자아낸다. 실재했던 사건이 제시됨에도 실물을 다시 확인하고자 하는 이런 욕망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뻥튀기 조각의 사진을 뒤적거리면서 우리는 이러한 방식은 부족하다고 느낀다. 앞선 <파트타임로드>를 통해 우리는 증거가 항상 만족스러울 수 없음을 알았다. <난시>에서도 마찬가지로, 우리가 원하는 것은 실물의, 영상에서 만들어진 그 조각이지만 그 증거는 우리가 원하는 대로 제시되지 않는다. 대신 우리는 또 다른 기록을 보게 된다. <파트타임로드>에서는 운동감을 제시해 시간의 축을 흐트려 놓았다면, <난시>에서는 사건의 결과물을 비틀어 제시함으로써 운동감으로 표현된 시간의 축을 부정한다. 사건을 실제로 받아들이게 되는 기제를 뒤엎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느껴지는 감정과 감각들은, 우리를 과정에 이은 결과물이라는 시간의 흐름이 아닌 과정과 그 반복 자체로 눈을 돌리게 한다. 시간의 축을 세워두고, 공간의 축을 그리는 노력은 여기서도 진행 중이다.

이러한 태도는 영상의 스크리닝 방식에서도 마찬가지로 유지된다. <난시>는 각기 다른 벽에 걸린 3 개의 채널 영상으로 제시된다. 다채널 방식의 상영은 시간을 기준으로 하는 ‘다음’이 아닌, 공간을 기준으로 하는 ‘옆’에 이미지를 재생하여 이미지 간의 대화와 그를 수용하는 관객의 인지성에 주목하게 한다. 공간 내에서 여러 면의 이미지를 받아들이는 관객은 한 스크린에서 재생하는 하나의 시간 축만을 따르지 않으며, 각기 다른 스크린의 영상을 주체적으로 재조합하게 된다. 이를 통해 관객들은 시간의 축을 붕괴하고 새로이 생겨나는 공간의 축을 의식하기 시작한다.

<돌 산호>

작업실 앞 주택의 외부에 주차방지를 위한 ‘간이-시멘트-조각’이 만들어진다. 많은 주택가에서 횡행하는 방식으로 만들어진 이 조각은, 시간이 갈수록 변화하고 때로는 진화하면서, 외부인의 주차를 막는 역할을 수행한다. 조각의 변이 과정은 (집주인과 주차자가 주고받는)심리적 풍경이 조각으로 드러나는 과정을 보여준다. 생명체와 같이 자라는 도시의 미시적인 풍경이다. 생명체(산호)가 자라는 데에는 시간이 필요하나, 인공적 생명체인 이 조각은 시간의 영향에서 빗겨난 채 심리적 풍경을 흡수하면서 자라난다. 본 전시에는 영상, 사진, 설치 작업이 제시되었다. 그 중 영상작업들은 내제적으로 시간을 포함하는 매체특성상 작품의 내적 차원에서 시간을 역설한다. 이에 반해 사진과 설치 작업들은 닫힌 시간을 표현하면서도 작가의 관점을 지지하며, 닫힌 표면으로서 시간에 반발한다.

부르기

<비상복귀수단>

옥상으로 올라가면, <망원경>을 바라볼 수 있는 위치에 <비상복귀수단>이 놓여있다. 하나의 호스로 연결된 호루라기 한 쌍은 바닥에 놓여있고, 관람자의 뒤편에 있는 스피커에서는 말싸움의 리듬을 차용한 호루라기 소리가 들려온다. 작업을 관찰하는 과정에서 언어는 탈락되고 신체의 지형도를 상상하게 된다. 숨을 들이마시고-폐가 부풀고 내뱉-코가 아니라 입을 사용하여-는 인위적인 호흡이 이뤄지고 있음을 깨닫는다. 이를 통해 ‘호루라기를 분다’에 수반되는 신체적 과정과 단순화된 해부도를 떠올린다. 이는 생물학적 활동의 물질적 치환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방심의 기로에 선 순간, 들려오는 소리는 뒷목에 난 작은 솜털들을 무자비하게 스치는 듯 하다. 호루라기 소리는 경각심을 이끌어내려는 듯, 방심하기 어려운 타이밍을 두고 지속된다. 그러나 소리의 무분별한 리듬에 익숙해지면, 어느새 소리는 ‘들리지’ 않는 식별 불가능한 소음으로 치환된다. 최초의 정보(말싸움에서 쓰였을 ‘말’)는 하나의 음조로 교체되고, 그에 따라 말에 담겼던 정보 역시 해독 불가한 단위로 축소된다. 최초의 정념들은 압축당하고 냉동된 채, 단순하고 무의미한 자극단위가 된다. 소리는 곧 무용한 연대이자 구호이다. 무용함으로 단락되는 노동력의 연상을 통해 유용함을 찾으려는 우리의 욕망을 되받아치고 있는 것이다. 이 소리를 들으며 <망원경>을 바라본다. 글의 머리로 돌아가보자, “경험은 정보나 정리가 되기 전의 ‘전달체’로 완결되어서는 안 된다. 시간의 경과나 강제성과 무관하게 잔존하는 것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 순간에 우리가 멈춰 발견해야 하는 것들이 사실이 아니라면, 무엇일까.”

닫기

현실에서 시간의 축을 인정한다. 그러면서도 시간의 강제성에 반발한다. 동시에 과거에 속하면서도 현재형으로 진행되는 시간들에 집중한다. 과거의 시간들을 조각내거나 순서를 뒤섞는다(<파트타임로드>) 과녁이 아닌 화살을 보게 하고(<망원경>), 예측했던 결과물을 찾아 헤매게 하고(<난시>), 뒤에서 불러세운다(<비상복귀수단>). 이러한 방식들로 엄지은은 ‘묻는다’. 시간의 축과 그 견고함에 대해서, 이 견고함을 더욱 강하게 하는 것은 우리의 욕망이진 않을지를 묻는다.

호명에의 욕구는 그 무용함에도 불구하고 잔존한다(<비상복귀수단>). 호명 자체로는 시간의 축을 뒤집을 수 없다. 그럼에도 엄지은은 시간의 구조를 뒤섞고, 시간의 경과에 따른 결과물을 은폐하거나, 시간과 관계 없이 유지되는 것들(<망원경>), 시간과 관계없이 자라나는 것들(<돌산호>)을 제시함으로써 시간의 붕괴를 의도한다.

시간의 강제성은 전시장 안(영상)에서 인지되기 시작하여 밖(옥상)으로 팽창된다. 그리고 일상으로 확산된다. 이를 인지할 수 있는가? 이러한 감각은 얼마나 오래 지속될 수 있는가? 밖으로 크게 한 걸음 걸어 나간다. ‘이러한 질문들은 여전히 시간에 종속되어 있지 않은가?’ 시간의 축이 아닌, 다른 축을 만들어 낼 수 있다면, 그 위에서 우리는 사건에 대한 사실이나 의견이 아닌, 징후들을 발견할 수 있다. 그리고 징후들은 고요한 표면으로 남는다. 전시장을 찾은 관객은 이 고요한 표면 위를 걷는다. 이 ‘걷기’는 ‘사유하기’로 치환될 수 있다. 고정된 힘(시간)에 묶이는 대신, 한 발자국 뒤에서 그 힘과 (힘을 만들거나, 변형시키거나, 유지시키는) 과정을 사유한다. 매 순간 지배받고 있는 현실 세계의 시간이 아닌, 공간의 축 위에서 새로이 만들어진 시간을 마주할 때, 기존의 시간이 갖고 있던 강제성은 약화되고 우리는 고정되지 않는 과정으로서의 시간을 마주한다. 기존의 사유체계로 쉬이 독해되지 않는 상황과 고정된 결말을 해독하려는 시도를 통해 우리의 사유는 굴절되고, 굴절된 빛은 밝혀진 적 없는 곳을 비춘다. 표면 위로 떠 올랐다가 다시금 가라앉은 물음이 답을 얻지 못하고 미약하게 진동하는 곳, 이곳을 우리는 다시금 들여다본다.

1 이 글은 많은 부분을 들뢰즈의 영화이론과, 정동이론에 기대고 있다.

2 리얼타임에 대한 정의는 학자마다 상이하나, 이 글에서는 ‘연출되지 않은 실제 상황을 녹화한 경우’에 한정한다.

3 작가노트 중에서

© Jieun Uhm  2020